시 세상/시를 위하여 (시인들의 좋은 시)

아름다운 발아 / 신병은

이삐김밝은 2014. 3. 26. 22:53

 

 

 

 

 

 

아름다운 발아發芽

 

                              신병은

 

건너는 화법을 몰랐다

열릴 것이라고 믿었지만 눈감은 단단한 기억일 뿐이었다

눈빛 무성한 원시림의 기억이 물의 허물로 남아

저물녘이면 한없이 흐르고 싶어 젖은 집 한 채를 짓는

그 여자, 물을 돌려주세요

뜨거운 곳을 열어 밤새 호로롱 호로롱 맑은 물소리를 내다

아침마다 휘어있는 것들의 척추를 바로 세워주는

그 여자의 자존, 바람을 돌려주세요

겨울바다를 가로질러 거실 한가운데 까지 성큼성큼 들어와

난분의 잎새 위에 앉았다가 사각형의 유화액자를 힐끔거리다

겨울 눈빛 허전한 허리를 껴안는다

이윽고 지난 가을 낙엽 진 아랫목에 형광의 지느러미를 세운

그 여자, 비워낸 자리에 몇 개의 말줄임표를 달고

가끔은 시도 때도 없이

야릇한 웃음꼬리 살랑대며 달려오는 저 바람으로

한 달에 한 번 봇물 터지는 아랫목을 데운다

...... 열릴 것이다

오랜 기억이 한 생애가 되는 저 여자의 꽃눈,

뼈가 되고 싶은 바람의 오르가즘이라 했다

 

-웹진시인광장 2월호-

 

 

<약력>

1955년 경남 창녕 출생, 1989년 《시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바람과 함께 풀잎이』(혜화당, 1990)『꿈의 포장지를 찢어내며』(혜화당1994),『강건너 풀의 잠』(혜화당, 2003)『바람 굽는 법』(소리, 2006),『잠깐 조는 사이』(고요아침, 2010)과 시화집 『2+1』(까치, 2005). 『휴』(고요아침, 2014)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