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 함박눈 총판
- 박형권
우리의 가난은 음악이어서
피아노를 항상 큰 방에 모셨다
좁은 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우리의 자부심이었던 가난을 고작 삼천 원에 팔았다
─이건 버리는 비용이 더 들어요, 이걸로 따님 과자나 사주세요
팔려간 가난이 허기를 입고
지금 알뜰 피아노 총판에서 비발디를 연주한다
밤새 내린 눈 위에 또 눈이 내려
아내와 내가 두 마리의 펭귄처럼
뒤뚱뒤뚱 돈의 파고(波高) 높은 곳으로
삼 개월 밀린 공과금을 내러 가는 길
엄마 아빠 돈 빌려서 돈 내러 가는 기분 꿀꿀 하실 테니
기분 좋아지라고 겨울을 연주한다
그래
네 목소리를 우리는 기억하지
음표였다가 콩나물 천 원어치였다가
우리 식구들의 장엄한 청국장이었던 너의 악보를 기억하지
─그까짓 삼천 원 받지나 말걸
뒤뚱뒤뚱 뒤뚱 미끄덩
알뜰 함박눈 총판 내 아내가 미끄러지고 만다
난 우리가 궁금하다
왜 미끄러지면 다시 일어나야 하는지
미끄러진 김에 누워 있으면 왜 안 되는 것인지
함박눈 저가로 공급해주시는 이런 날에는
더 안 되는 것인지
『서정시학』2013년 겨울호
- 200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우두커니><전당포는 항구다>
출처 : 폴래폴래
글쓴이 : 폴래폴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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