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목赤目
윤성택
이별이 목발을 하고 우리를 지난다 을씨년스런 예감이 새벽의 안감에 박혀 스르르 말줄임표가 되어가는 별, 환자복에서는 파란 눈이 송이송이 날리고 소독약 냄새 같은 추억도 자정을 넘긴다 이별부터 시작되는 날이 맨 처음 첫인상에 이르면 운명도 단지 멀미일 뿐, 누구를 만나다는 건 이제 각오하고 우연과 헤어지는 것이다 불면에 구면(舊面)을 겹쳐본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알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비밀이 때로 비밀을 만나 돌아오지 않는 상상, 한쪽 어깨의 당분간 타인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나 자신을 데리고 그에게 유배를 가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폐병을 앓다 죽은 날이 그가 나를 순장하듯 깨닫는 순간이다 추억이 한 문장씩 지워지면 검은 페이지의 내일이 바람을 훑으며 넘어온다 현재는 빛으로 꽉찬 문틈 같다 기억이 오래되면 그날 구체적인 상황이 유화처럼 뭉개져 알 수 없는 색을 굳어간다 그리고 아주 작은 점으로 일생 안에 찍혀 화소가 되어 가겠지 그러니 나는 그림이 되어가는 중이고 결국 하나의 그림이 내 안에 들어와 이젤을 펴는 것이다
계간 『시와 사람』 2013년 가을호 발표
윤성택 시인
충청남도 보령에서 출생. 2001년 《문학사상》에 〈수배전단〉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리트머스』(문학동네, 2006)가 있음. 현재 문화예술마을 헤이리 사무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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