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서 날다/ 정숙자
절벽이란
지옥의 입구였다
나는 조류가 아니었기에
한 눈금 한 눈금 서슬 푸른 벼랑이 밤사이에 몇 척씩 자라 올랐다
그 수치는 날더러 꺼지라는 암시였다 질시였다 박해였다
나는 침묵했다
침묵 속에 절벽을 구겨 넣었다
절벽은 구겨지면서 내 속울음보다 더 붉게 오열했다
그런 절벽도 처음에는 우리 집 앞마당 버금의 지반이었다. 그러나 지반은 언제라도 지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 나는 뒤늦게 날개를 마련하는 일에 착수했다. 비상(飛翔)만이 별의별 절벽들을 일거에 그어버릴 도구였기에, 그리고 폐활량을 늘렸다.
심신만 건강하다면
내 식탁과 컴퓨터만 깨지지 않는다면
절벽은 능히
놀 만한 장소였다
아니, 절벽이 아닌 시간은
백색소음 질척거리는
저잣거리일 뿐이었다
- 시집 『뿌리 깊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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