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세상/시를 위하여 (시인들의 좋은 시)

절벽에서 날다/ 정숙자

이삐김밝은 2013. 4. 26. 15:41

 

 

절벽에서 날다/ 정숙자

 

절벽이란

지옥의 입구였다

나는 조류가 아니었기에

 

한 눈금 한 눈금 서슬 푸른 벼랑이 밤사이에 몇 척씩 자라 올랐다

그 수치는 날더러 꺼지라는 암시였다 질시였다 박해였다

 

나는 침묵했다

침묵 속에 절벽을 구겨 넣었다

절벽은 구겨지면서 내 속울음보다 더 붉게 오열했다

 

그런 절벽도 처음에는 우리 집 앞마당 버금의 지반이었다.  그러나 지반은 언제라도 지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 나는 뒤늦게 날개를 마련하는 일에 착수했다. 비상(飛翔)만이 별의별 절벽들을 일거에 그어버릴 도구였기에, 그리고 폐활량을 늘렸다.

 

심신만 건강하다면

내 식탁과 컴퓨터만 깨지지 않는다면

절벽은 능히

놀 만한 장소였다

 

아니, 절벽이 아닌 시간은

백색소음 질척거리는

저잣거리일 뿐이었다

 

- 시집 『뿌리 깊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