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청비
- 최형심
침묵이어서 거침없는 필체가 뜰로 번집니다. 적막한 한낮 그리운 눈알들이 자라고 있다고, 나의 눈먼 그림자에 당신을 섞습니다. 내게서 씻겨나간 당신의 눈웃음은 얼마나 차가워졌을까요?
숲이 목을 늘려 동창을 드나들면 베틀에 머리를 누인 산마루의 몸빛이 서늘합니다. 비단으로 바람을 짓고 한 줌 씨앗 같은 숨소리를 심습니다. 책을 접고 눕는 눈향나무가 편애하는 방향으로 빈 배를 밀며 간 이를 알고 있습니다.
이 세계를 견딜 수 없어 풍경이 됩니다. 나는 당신의 이물감. 침묵이 은어 떼의 등줄기를 숨길 때도, 빗방울이 여름곡식 속으로 스밀 때도 늘 밤을 품었습니다.
실핏줄로 한 폭의 삽화를 그립니다. 소년을 오르는 바람의 등을 본 것도 같습니다. 등 굽은 잔물결, 수로를 따라 흘러갈 수 없는 것들만 하오를 나고 있습니다. 그늘에 든 이야기에 연둣빛 혀가 돋고, 잠시 낮달을 손에 넣어봅니다. 서녘에 이르는 것들은 모두 맨발입니다.
낮 안으로 담장이 지고 숲의 노을로 어두워집니다. 하나의 등불은 수면 위로 내걸리고 하나의 등불은 수면 밑으로 내려갑니다. 물 뱀에게 혀를 물린 물의 저녁은 달의 모서리로 부풀어 오릅니다.
나는 사부시 말라버린 그늘. 빈손을 헐어 별들을 짜다보면 어슬녘 허기는 처마 밑 어둠의 무늬가 됩니다. 밤과 달이 등을 돌립니다. 어둠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내가 투명해집니다. 실뱀이 소리없이 울고 이제 회유어의 무리를 기다립니다.
*자청비 : 제주 설화 속 사랑과 농경의 여신
『현대시』2012년 5월호
-서울대 외교학과, 동 법과 대학원 박사수료.
2008년『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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