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세상/시를 위하여 (시인들의 좋은 시)

[스크랩] 해변의 진혼곡 / 신철규

이삐김밝은 2013. 4. 15. 19:23

 

 

 

 

 

 

 

 

 

      해변의 진혼곡

 

                                                          - 신철규

 

 

 어떤 기대도 없이 여기에 왔다

 해면을 은빛으로 물들였던 태양은, 수평선에 가까워지면서 굵고 붉은 동아줄을

 늘어뜨린다

 구름의 조문 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다

 

 우리는 엉망으로 취했고 흐트러지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다른 별에서

 환생하기 위해서는 이 별에서 죽어야 한다

 

 새파란 입술과 붉은 입술이 만난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말이 있고 또

 무덤이 있다 검은 입술이 될 때까지

 입을 꾹 다문다

 너의 무덤에 혀를 밀어넣는다 심장과 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주먹을 쥐고 달려오던 파도가 해변에서 손가락을 쫙, 편다

 바다에게는 사막이 오아시스다

 바다는 사막을 마시고 싶어서 계속 해안으로 밀려온다

 내가 얼마나 메말랐기에 너는 그처럼 밀려오는가

 사막 한가운데의 붉은 우체통에는 모래가 그득하다

 

 우리를 여기에 데려다주었던 날개를 벗는다

 나비는 날개부터 부패하기 시작한다 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바다는 뭍에서 흘러온 폐품들을 계속 밀어낸다

 

 가난한 사람은 주머니가 많다 주머니가 많아서

 손을 잃어버리는 때도 있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 관 속의 시신도 주머니가 필요없다

 죽은 자에게는 어떤 기대도, 어떤 망설임도 없다

 

 우리는 각자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로의 심장을 만지작거린다

 어둠의 손목이 옆구리를 휘어감는다

 

 

 

 『포엠포엠』2012년 겨울호

 

 

 

 - 1980년 경남 거창 출생. 고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1년『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출처 : 폴래폴래
글쓴이 : 폴래폴래 원글보기
메모 : 해변의 진혼곡은 어떨까 봄날의 바다를 찾아갑니다 폴래폴래님...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