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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술의 미학 (외 1편)/ 김밝은

이삐김밝은 2017. 8. 1. 11:43

술의 미학 (외 1편)

 

김밝은

 

 

 

가끔 심장이 시큰둥해지는 날

 

곱게 부순 달빛가루에 달콤한 유혹의 혀를 잘 섞은

목신 판의 술잔을 받는다

 

찰나의 눈빛에 취해 비밀의 말들을 너무 많이 마셨나

날을 세운 은빛 시선이 애꿎은 꽃잎만 잘라내고 있다

 

물구나무서던 시간들이

절룩거리는 기억을 붙잡고 일어서고

살 속에 섞인 위험한 말들 잠들지 못해

서로 흔들리고, 깨어지기도 하면

 

옆구리를 내어주며 쨍쨍 부딪치던 건배의 얼굴이

늑골 어딘가에 콕콕 박혀 가쁜 숨을 몰아쉰다

 

끝내 토해내지 못해

상처 난 이름으로 가슴 울렁거리고

 

손가락만 흔들어도

열꽃처럼 번져가는 뜨거운 노래들로

바람 속 영혼들처럼 마음 흩날리는 날*

 

사랑이 사랑으로도 치유되지 않아

벌거벗은 혀들이

 

술잔 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 인디언 달력에서 1월을 뜻하는 말 중 ‘바람 속 영혼들처럼 눈이 흩날리는 달’에서 따옴.

 

 

자작나무 숲에 내리는

 

 

 

아릿하고 매운 하늘을 머리에 인

길이 멀미를 하듯 지나갑니다

 

직립의 시간 속

누구 하나 말 걸어오지 않는 날

 

몸은 늘 가로로 누우려 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흰 바람만 푹푹 쏟아집니다

 

허공으로 길을 내던 고광나무 곁을 지나

천지간 뭉클한 그대의 집,

가는 길은 멀어서

 

겨울을 걸어가는 홍방울새의

눈 속에 숨겨두었던

오래된 말들이 등을 보이며 떠나갑니다

 

풍화되어가는 약속의 전언

나는 일찍이 입어본 일이 없는 납의 무게를 입*고도

 

아직

그대를 기다립니다

 

 

* T.로스케의 시「지금은 무엇」중에서.

 

 

 

                       —시집『술의 미학』(2017. 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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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밝은 / 1964년 전남 해남 출생. 본명 김기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과 졸업.  2013년 《미네르바》로 등단.  현재 《미네르바》편집위원, 《월간문학》편집국장. 시집 『술의 미학』.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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