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미학 (외 1편)
김밝은
가끔 심장이 시큰둥해지는 날
곱게 부순 달빛가루에 달콤한 유혹의 혀를 잘 섞은
목신 판의 술잔을 받는다
찰나의 눈빛에 취해 비밀의 말들을 너무 많이 마셨나
날을 세운 은빛 시선이 애꿎은 꽃잎만 잘라내고 있다
물구나무서던 시간들이
절룩거리는 기억을 붙잡고 일어서고
살 속에 섞인 위험한 말들 잠들지 못해
서로 흔들리고, 깨어지기도 하면
옆구리를 내어주며 쨍쨍 부딪치던 건배의 얼굴이
늑골 어딘가에 콕콕 박혀 가쁜 숨을 몰아쉰다
끝내 토해내지 못해
상처 난 이름으로 가슴 울렁거리고
손가락만 흔들어도
열꽃처럼 번져가는 뜨거운 노래들로
바람 속 영혼들처럼 마음 흩날리는 날*
사랑이 사랑으로도 치유되지 않아
벌거벗은 혀들이
술잔 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 인디언 달력에서 1월을 뜻하는 말 중 ‘바람 속 영혼들처럼 눈이 흩날리는 달’에서 따옴.
자작나무 숲에 내리는
아릿하고 매운 하늘을 머리에 인
길이 멀미를 하듯 지나갑니다
직립의 시간 속
누구 하나 말 걸어오지 않는 날
몸은 늘 가로로 누우려 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흰 바람만 푹푹 쏟아집니다
허공으로 길을 내던 고광나무 곁을 지나
천지간 뭉클한 그대의 집,
가는 길은 멀어서
겨울을 걸어가는 홍방울새의
눈 속에 숨겨두었던
오래된 말들이 등을 보이며 떠나갑니다
풍화되어가는 약속의 전언
나는 일찍이 입어본 일이 없는 납의 무게를 입*고도
아직
그대를 기다립니다
* T.로스케의 시「지금은 무엇」중에서.
—시집『술의 미학』(2017. 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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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밝은 / 1964년 전남 해남 출생. 본명 김기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과 졸업. 2013년 《미네르바》로 등단. 현재 《미네르바》편집위원, 《월간문학》편집국장. 시집 『술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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