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세상/시를 위하여 (시인들의 좋은 시)

[스크랩] 비밀이 사랑을 낳는다/ 이재무

이삐김밝은 2013. 6. 25. 19:15

 

 

비밀이 사랑을 낳는다/ 이재무

 

더 이상 비밀이 없는 삶은 누추하고

누추하여라 사랑하는 이여, 그러나

내가 밟아온 저 비린 사연을 다 읽지는

말아다오 들을수록 역겨운 냄새가 난다

나는 안다 내생을 그대 호기심 많은

눈이 다녀갈수록 사랑이 내게서 멀어져간다는

것을, 오월의 금빛 햇살 속에서

찬연한 꽃 한 송이의 자랑을 자랑으로만

보아다오 절정을 위해 온 생을 앓아온

꽃의 어제에 더 관심이 많은 그대여,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아직 우리에게 비밀이기 때문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살기 위해

소리없는 처절한 절규를 쉬지 못한다

생의 이면이 늘 궁금한 그대여,

그 어떤 갈애가 그대의 잠을

앗는 날은 어둠이 실비처럼 내리는

여름의 서늘한 숲 속으로 한 마리 새의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걸어가보아라

그대는, 그대가 만들어내는 작은 발자국

소리에도 크게 놀라 두리번거릴 것이다

숲은 파고들수록 외경과 비의로 가득 차고

그대는 문득 살아 있다는 것의 존엄과

두려움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이 비루하지 않고 신성한

선물이라는 것을 보고 온 그대는 충분히

아름답다 내가 그대를 한없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토록 간절했으나 여직 그대의 생에

내 기다림의 손이 가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 보아라, 생의 비밀이 사라진 뒤

지상의 거리에 넘쳐나는 그 무수한

추문과 널브러진 사랑의 시체를

 

―시집 『위대한 식사』 세계사, 2002

 

―이재무

. 1958년 충남부여출생,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 1983년 무크지《삶의 문학》에 〈귀를 후빈다〉외 4편으로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섣달 그믐》《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벌초》《몸에 피는 꽃》《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푸른 고집》《저녁 6시》《경쾌한 유랑》등

.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대상 수상

출처 : 계간미네르바작가회
글쓴이 : 김기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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