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세상/문학동네

노령화 시대를 여는 후문학파 논의(박수중편-윤애경)

이삐김밝은 2016. 9. 22. 17:54


-부분 발췌함 -


  필자는 최근에 시집을 낸 박수중의 『크레바스』(미네르바 시선 35)를 접하면서 그가 후문학파 시인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우선 그의 이력을 3권의 시집에서 찾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4년 황해도 연안 출생

*경기중고 서울대 법대 졸업

*서울대 재학 중 낙산문학회 회장

*일본 교토대학원 수학

*외환은행 입사 후 34년간 근무

*재직 중 일본, 홍콩, 미국에 주재 12년

*재직 중 IMF를 만남

*외환코메르츠 투신운용(주) 대표

*은퇴 후 문학시대를 거쳐 미네르바 작가회에서 활동

*첫 시집 『꿈을 자르다』(미네르바시선 21)

*둘째 시집 『볼레로』(미네르바시선 28)

*셋째 시집 『크레바스』(미네르바시선 35)

   박수중 시인의 ‘선 인생’은 대학 재학 중에 문학 활동을 한 것과 금융계에 투신한 34년을 줄거리로 한다. 성종화 시인이 학생문사로 활동한 것과 유사한 이력을 보인다. ‘선 인생’에 문학적 열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후 문학’의 출발을 예고하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이병주처럼 ‘선 인생’의 서사적 요소가 ‘후 문학’에서 곧이곧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성종화와 일치한다. 그러나 박수중의 경우 외국 주재시의 기행적 체험들이나 시대적인 추억의 파편들이 간간이 형상화의 옷을 입고 선을 보이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성종화의 시가 대체로 체험의 정서적 대응인 데 비해 박수중의 시는 체험의 지적인 대응이거나 의식지향이라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세 권의 시집 중 첫 시집의 첫 작품을 보면 이 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와지시마淡路島의 외딴 길에서

내려버린 그대와의 세월

햇빛 쏟아지는 초봄의

환영幻影 속으로 사라져버렸네

그후로부터 나는

그대에게는 상관 없는 기다림이었지

빛나는 햇살의 그대를

멀리서 눈부시게 쳐다보아도

나는 늘 한갓 그늘에 불과하였네

한동안은

그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死角사각에 있더라도

시간만은 같은 세상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였네

어이 없게도 그것조차 착각이었느니

내가 살아온 그늘은

시간의 진화進化가 느려

낡은 기차의 기적 소리 이후

다시는 조우遭遇할 수 없는

그대 시간의 사각 시점에 갇혀 왔다네

-<블라인드 사이드>


  시집 상의 처녀작으로 읽히는 이 작품에서 화자는 그대와 헤어져 시간의 사각지대에 갇혀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박수중의 ‘선 인생’에서 일본 주재 은행원 생활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의 체험이 형상화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대와 헤어져 기다림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 그늘이었지만 그것이 공간의 사각지대라 하더라도 화자는 시간의 사각지대에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고 시간의 진화가 느린 기차의 기적소리 이후 화자는 시간의 사각지점에 있다는 자각을 보인다. 그대와의 별리를 시공간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국체험의 일단이고 그것이 ‘블라인드 사이드’라는 미식축구 용어를 빌어 보다 지적인 탐구의 공력을 보인다. 일본의 이와지시마섬과 초봄의 햇빛과 기다림이라는 풍경이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탐구라는 것에 걸맞는 햇빛과 그늘의 대응, 공간과 시간의 대응이 지적 프리즘으로 투영되고 있다.

  박수중의 ‘후 문학’이 주는 무게감은 이미지의 직조나 관념의 배열이 틈 없이 연결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다음의 시에서 박수중의 미국 체험을 만난다.

세월이 물결 치듯 흐르고

나는 다시 그곳에 갔다

그대의 부재와 함께

멀리 항구의 불빛이

안개 속에 반짝이며 다가오고

금문교의 붉은 조명이

밤하늘의 어둠 속에 짙게 걸려 있었다

초봄의 바닷가에선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낚시터에 선 우리에게 불어오고

가까운 기슭의 선착장에서는

이제 막 창마다 환한 불을 밝히고

하얀 여객선이 건너편 항구로

떠나가고 있었다

-만나면 그대는 언제나

싱그럽고 설레이는 바람이었지

그믐밤의 어둠은

바다와 하늘을 이어놓고

한 구석으로 먹구름을 칠하고 있었다

우리는 추억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잡히지 않는 그대의 포말에

안타까이 손을 뻗으며

-<티브론 해안> 전문


  인용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북쪽 해안가의 저녁 풍경이다. 앞의 시에 비해 낭만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항구의 불빛, 금문교의 붉은 조명, 하얀 여객선의 이동 등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그러나 화자는 ‘그대의 부재’라는 문제상황을 겪고 있다. 먹구름이고 포말로 부서지고 파도가 휩쓸리는 공간이다. 티브론 해안이기 때문에 그 부재는 더 아프게 다가온다. 이 시에서도 ‘선 인생’의 중심추에서 비켜나 있다. 중심추는 업무적이거나 시대적인 고뇌 같은 것이 녹아있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부터 ‘선 인생’의 후동적 문학이라는 욕심을 버려야 할 듯싶다. <하라주쿠에서>나 <요세미티 회상>이나 <페블비치 회상> 등은 중심추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두 개의 갈퀴 발가락으로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어요

하루에 몇 번인가 움직이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생각없이 허공을 지키는 그냥 나무이지요

나는 느려요

차라리 점으로 찍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온종일 꿈을 꾸며 보내지요

바람의 끝에서 그대가

다가오기를 한없이 기다려요

내게는 기다림이 곧 사는 거지요

세월도 같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요

거꾸로 보이는 세상에선

하늘이 땅이고

옛날이 지금이예요

구름이 지나가고 비가 내리고 햇빛이 쏟아져도

그대가 나를 나무의 요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때까지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대가 오지 않으면

그대로 연리지로 굳어지겠지요

그러니까 그대여

섬광처럼 내게 와서 나를 깨워 줘요

그제서야 비로소

나무의 주술에 걸린 나의 시간이

다시 풀릴 테니까요

-<나무늘보> 전문


  인용시는 그대를 기다리며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나무늘보(화자)의 기다림에 대해 쓴 시다. 그대를 기다리며 점으로 찍혀 있고, 거기서 온종일 꿈꾸며 사는 짐승이 곧 나무늘보이다. 거꾸로 보이는 세상에선 하늘이 땅이고 옛날이 지금이라는 것, 비가 내리고 햇빛 쏟아져도 기다리며 매달려 있으므로 연리지가 되기 전에 그대가 와서 나무의 주술에서 풀어달라는 것이다. 그대는 누구일까? 인간 실존의 기약 없는 구원자일까, 그런 날이 올 수는 있는 것일까, 이렇게 매달려 있음이 오히려 답인지 모른다는 것, 그런 사색이 의식의 단층을 이룬다. 의식지향의 존재감이 절실하다. 시상이나 견디기의 의식이나 생각하는 바의 지적인 탐색 같은 것이 이 시의 본질로 읽힌다. 그는 대상을 스스로에게 끌어오는 데 밝고 지혜롭다. 연륜을 바라볼 수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후문학파의 입지가 드러나 있음이다.

박수중의 ‘선 인생’의 ‘학생시절’은 놀랍게도 체험의 배경에 꼭꼭 숨어 있다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반가운 해후 같이 읽히는 시다.


그때 우리는 모두 가난해서

목이 긴 워커 군화에

청계천변에서 검게 염색한

군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어요

최루탄 가루가 하얗게 묻은 채로

경찰서 유치장에 내동댕이쳐져도

염색옷은 자유로웠고

부잣집 솜옷보다 편했지요

거리에서도 마로니에 밑에서도

밀폐된 시간의

지독한 담배연기 속에서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았던 그 옷은

엄혹한 시대에도

더러움을 타지 않았어요

-<시절을 염색하다> 전문


  인용시는 1960년대의 엄혹한 시대가 추억의 세계로 인화되어 있다. 화자는 대학생이고 워커 군화에 염색 군복을 입었고 최루가스를 밥 먹듯 마시며 지냈고 경찰서 유치장에 내동댕이쳐지기가 예사였다. 그런 시절의 밀폐된 시간을 견디던 옷,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남아 있는 옷, 더러움이 타지 않은 순수 무결의 옷이 당시의 대학생의 또 다른 제복이었다. 시절을 염색했던 옷이기에 아직 그 옷은 추억의 공간에서도 바래지 않은 옷이다. 화자는 추억에 젖어 있지만 아직 그 추억은 역사로 진행 중이다. 이 시를 두고 우리들 독자의 반가운 해후로 보는 것은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는 이 시절의 풋풋함을 그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렇다고 이병주의 기록적 반성이나 노예로서의 준열한 자각의 선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시적 양식이 갖는 서정성이라는 제약을 뛰어 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박수중 시의 무게는 다음과 같은 시에 실리고 있다. <규격론>이 그것이다.

동물병원 애완견 철창 속에

족보꼬리표가 붙어 있던 나는

어느 날 35층 아파트로 팔려 갔다

주인은 나를 목욕 시킨 뒤 내 피부를

스님의 독두처럼 깨끗이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붉고 푸른 그러나 나에게는

옥죄기만 하는 죄수복을 입혔다

먹는 것은 정체불명의 알약이었고

늘 같은 것이었다

나는 점차 맛을 잃어갔다

그들에게 재롱을 소모할 때를 빼고는

나는 거의 골방구석에 갇혀 지냈다

며칠에 한 번씩 식구들이 나를 끌고

산책을 할 때에만

나는 목이 끌리면서도 조금 살아났다

그렇게 두 살쯤 나이를 먹자

주인은 나의 생식기를 제거해버렸다

저 심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울부짖고 싶었지만

성대는 이미 절제되어 있었다

-<규격론> 전문

  인용시는 애완견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다. 그 비극은 애완견 철창 속에 갇혀 지내다가 35층 아파트로 팔려나가 주인은 애완견의 뜻과는 무관하게 전신의 털을 밀어버리고 붉고 푸른 죄수복을 입힌 데서 온다. 늘 알약을 먹어야 했고 입맛은 잃어갔고 늘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어쩌다 산책을 할 때 목이 매인 채 끌리듯 나돌아보는 것이 자유의 전부였다. 주인은 애완견의 생식기를 절단하고 드디어 울지도 못하게 성대마저 잘랐다.

애완견은 인간에게 사육되고 인간이 필요한 때 재롱거리로 사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시인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애완견의 비극을 말하는 것일까. ‘족보 꼬리표’와 ‘죄수복’이 환기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한 번 꼬리표는 영원한 꼬리표라는 점, 죄수는 남녀 성별과 관계없이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치죄된 자의 모습이다. 일단 이 시는 인간이 가지는 본질적인 부조리에 관한 것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시대적인 의미의 순응주의에 묶여 있는 자의 비극에 관한 것일 수 있다. <시절을 염색하다>에 연결하면 후자의 의미가 될 것이고 <나무늘보>에 연결하면 전자의 입장이 될 것이다. 필자는 존재론과 시대론의 양자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만큼 박수중의 시는 외연이 넓고 내포가 깊다. 그의 시가 중량감을 가진다고 한 것은 여기에 그 까닭이 있다. 한용운의 ‘님’이 내포하는 것과 유사하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고 한 대목에서 우리가 님의 운동성을 짐작한 것처럼 말이다.

  박수중은 확실히 지적이면서 의식지향의 세계를 보이는 시인이다. 일부 낭만적인 터치와 이미지들이 있으나 그의 시에는 부단히 ‘그대’에 대한 부재를 지적하고 있다. 그대는 누구에게나 ‘긔룬’ 존재로 있어야 할 대상이다. 그 갈증 언저리에 박수중 시의 핵심이 놓여 있다.







박수중의 『크레바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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