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세상/시를 위하여 (시인들의 좋은 시)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류시화

이삐김밝은 2012. 5. 12. 07:57

 

 

 

 

 

이런 시를 쓴걸 보니 누구를 그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류 시 화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의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삶이라는 것이 언제~마모시키는 삶' - 옥타비오 빠스 (태양의돌)에서

 

<문학의 숲, 2012. 나의 상처는 돌 너의상처는 꽃, 류시화 제 3시집>